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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1월 30일)

by 혼자투어 2020.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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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30일

독일 초호화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소련 해군 잠수함에 격침

 

 

1945년 1월 30일 아침 동프러시안 가드니아.초대형 유람선이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유유히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발트해 한복판에 있었던 유람선이 갑자기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1937년 5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진수식이 열렸다.

나치 독일은 국민들의 심신 단련과 휴양을 목적으로이 배를 제작했는데 당시 폭스바겐의 비틀 자동차, 국민 라디오와 함께 나치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안락하고 쾌적한 해외여행을 위한 각종 운동시설, 대형수영장 등 다양한 위락시설들이마련 되어 있어 배 안에는 연일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1929년9월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더이상 출항 할 수 없게 되었다.빌헬름 구스틀로 프호가 발트해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배 안에서는 신음소리와 절규만이 가득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부상병을 나르는 병원선으로 그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졌고, 그동안 독일군의 만행에 시달렸던소련군은 군인들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 들까지 학살했다.

이에 독일의 칼 되니츠 총통은 부상병과 민간인 200만명을 독일 서부의 안전한 곳에 이주시키기 위한 ‘한니발 작전’을 명령했고 당시 여객선이나 화물선, 군함 등 모든 종류의 배가 이 작전에 총동원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도 피난민 구출작전에 투입되었다.전쟁의 공포에 떨었던 피난민들에게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의 배였다.

당시 승무원이었던 하인츠 쉰의 증언에 따르면 총 승객은10,582명이었고,그 중8,956명이 피난민이었으며,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는 총 4명의 함장이 타고 있었는데,당시 최고 연장자 였던 프리드리히 패터슨의 의견에 따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발트해의 깊은 바다를 항로로 삼았고, 항해등을 켠 채 운항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항해등을 켠 채로 달린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어두운 밤에도 너무 쉽게 눈에 띄였고결국 출항한지 하루도 못되어 소련 잠수함 S-13호에 의해 발견되었다.

S-13호는 4발의 어뢰를 발사시켰고 그 중 3발이 명중했다.어뢰를 맞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아비규환이 되었고 어뢰 공격을 당한 후 1시간 10여분 만에 침몰했다.

배에 타고있던 피난민들은 어뢰에 직접적인 충격으로 사망하거나 발트의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100,000여명이 넘는 피난민 중 9,343명이 목숨을 잃었고,이는 최대 해상 사고로 알려진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의 사망자보다 무려 6배나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은 침묵 속에 묻히고 말았다.그리고 사고 발생 57년 후인 2002년 독일의 대표

작가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가 발표되면서그동안 금기시 되어오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건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은 영원히 수장되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안타깝게 죽어갔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피난민들은 지금도 그 비극을 간직한 채북위 55도 7분, 동경 17도 41분, 수심 60m 해역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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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국군 북경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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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제1차 영일동맹 조인

▶1902년 시베리아철도 (블라디보스톡 - 하바로스크 구간) 개통

▶1899년 대한천일은행(현 상업은행) 창립

▶1895년 러시아 황제 전제정치 선언

▶1882년 미국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 출생

▶1878년 러시아,터키 휴전조약 체결

▶1781년 독일 시인 샤미소 출생

▶1649년 영국 국왕 찰스1세 처형

▶1637년 병자호란때 인조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

▶1621년 조선, 무과에서 대리시험이 공공연히 자행

자료출처 https://youtu.be/PVMHXfMGD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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